





























전두엽 절제술, 인류 의학사의 가장 섬뜩한 그림자
- 인류 의학 역사상 이토록 섬뜩한 치료법은 드물다. 초기에는 두 마리의 유난히 평온한 침팬지를 대상으로 한 호기심 어린 실험으로 시작되었지만, 전두엽 절제술 또는 뇌엽 절제술로 불리었던 이 방법은 곧 정신의학계 전반에 퍼진 하나의 움직임으로 번져나갔다. 정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했지만, 그 결과는 침묵과 공허,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상실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낙인이 극심하던 시대, 뇌엽 절제술은 단순한 치료법이 아니라 사회가 감당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억지로라도 해결하려 했던 필사적인 반응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고통을 ‘치유’하고자 믿었던 의사들, 해결책을 갈망하던 병원과 제도,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른 수많은 환자가 있다. 환자 대부분은 충분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술에 몸을 맡겨야 했다.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비극, 이 논란의 중심에 섰던 시술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하다면?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자.
©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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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주목을 받은 침팬지 실험
- 1935년, 미국의 신경생리학자 존 파커 퓰턴(John Farquhar Fulton)은 충격적인 연구 결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두 마리 침팬지의 전두엽을 제거하자, 그들은 좌절감과 불안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퓰턴의 조수는 이 침팬지들이 마치 ‘행복 집단’의 신입 회원처럼 보였다고 말했으며, 놀라울 정도로 평온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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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큰 영감을 받은 신경학자
- 침팬지들이 비정상적으로 차분해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시술은 그들의 인지 능력 일부를 빼앗았다. 그러나 이는 포르투갈의 신경학자 안토니우 에가스 모니스(Ant nio Egas Moniz)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에게 있어 '끝없는 행복'이란,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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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실험에서 인류의 희망으로
- 퓰턴의 연구에 영감을 받은 모니즈는 이 뇌 구조 변경을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통해 다양한 정신질환을 치료하거나, 어쩌면 완치까지 가능하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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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논쟁적인 의료 시술의 탄생
- 그의 이러한 비전은 20세기 가장 논쟁적인 의료 시술 중 하나인 ‘뇌엽 절제술’의 출발점이 되었다. 비록 치료라는 명분에서 비롯된 접근이었지만, 뇌엽 절제술은 깊은 논란, 지속적인 후유증,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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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잘 이해되지 않았던 정신질환의 특성
-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의학계는 정신질환의 복잡한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날 각기 다른 질환으로 분류되는 증상들이 하나로 묶이거나 전혀 잘못 해석되었고, 이는 급진적인 이론들이 제지 없이 퍼질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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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히고설킨 고정 관념의 그물망
- 모니즈는 정신질환이 부정적인 사고가 뇌의 연결섬유, 특히 시상과 전두엽을 연결하는 부위에 ‘고정’되면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 두 영역은 감정과 감각 처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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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치유를 위한 "연결 끊기"
- 그는 이러한 신경 섬유를 절단하면 해로운 사고 패턴과 감정 장애를 차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바로 그가 고안한 악명 높은 외과적 시술, 전전두엽 절제술(prefrontal lobotomy)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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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 구멍
- 초기 뇌엽 절제술은 환자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고, 전두엽 피질과 뇌의 나머지 부분을 잇는 백질 경로를 절단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정신질환을 외과적으로 ‘치료’하려는 대담하고도 침습적인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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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30 Fotos
수술을 향한 비판
- 당시 모니즈의 동료 의사들, 특히 정신분석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은 이 방법에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대화 치료나 비침습적 접근을 선호했기 때문에, 뇌엽 절제술은 극단적이고 무모하다고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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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행된 수술
- 비판에도 불구하고 모니즈는 실험을 강행했다. 그는 조현병, 우울증, 불안증 등을 앓는 환자 38명에게 뇌엽 절제술을 시행했다. 그의 '실험'은 이후 정신외과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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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하게 내린 결론
- 모니즈는 즉시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약 3분의 2의 환자들이 차분하고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환각 증세가 줄어들었다고 주장했다. 이 초기 결과들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 효과를 입증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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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된 행동'이 완치라는 잘못된 개념
- 당시 정신의학계에서는 ‘행동의 안정’이 치료 성공의 기준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조용하고 수동적인 환자들은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호전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비록 환자들의 성격이 상실되거나 기능이 저하되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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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만든 '의료의 기적'
- 모니즈의 발표는 언론의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여러 신문들이 뇌엽 절제술을 ‘기적의 치료법’으로 소개하며, 불안한 마음에 평화를 안겨준다고 찬양했다. 이러한 긍정적인 보도는 뇌엽 절제술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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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생리의학상까지
- 결국 1949년, 모니즈는 그의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술은 미국에서 특히 강하게 뿌리내리게 되었으며, 이는 신경학자 월터 프리먼(Walter Freeman)과 신경외과의사 제임스 와츠(James Watts)가 적극적으로 전파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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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한 시설
- 1930~40년대에 이르자, 약 50만 명에 달하는 미국인들이 정신질환을 이유로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다. 당시 사회는 뇌엽 절제술을 통해 이들 중 상당수가 시설 밖에서 보다 통제 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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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한 사회적 편견에 따라 진행된 수술
- 그러나 문제는 ‘정상’이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실제 정신질환이 아닌, 성 역할, 성적 지향, 혹은 사회적 기대를 벗어난 행동만으로도 수용되었으며, 이는 일부 환자들이 의학적 필요가 아닌 사회적 편견에 따라 뇌엽 절제술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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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로 손상된 건강한 정신
- 그 결과, 뇌엽 절제술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실제로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지 않았다. 단지 ‘통제 불가능’하거나 ‘비정상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는 이유만으로 이 돌이킬 수 없는 시술의 대상이 된 것이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야말로 이러한 수술 남용의 주요 피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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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결과
- 뇌엽 절제술의 효과는 극단적으로 달랐다. 일부 환자들은 증상의 완화를 보였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결과가 치명적이었다. 시술이 얼마나, 언제, 어떤 방식으로 효과를 보일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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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대통령의 누나
- 이 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누이인 로즈메리 케네디였다. 그녀는 1941년, 뇌엽 절제술을 받은 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걸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으며, 남은 생을 시설에서 보내야 했다. 그녀는 2005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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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용
- 비록 일부 환자에서 환각이나 격한 감정이 통제되는 듯한 효과가 보였지만, 부작용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것이었다. 많은 환자가 무감각해지고, 의욕을 잃거나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으며, 운동기능 장애 및 인지 기능이 현저히 저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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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30 Fotos
지속적인 피해를 부추긴 침묵
- 정신질환이 깊은 낙인을 안고 있던 시대였기에, 가족들은 실패한 뇌엽 절제술에 대해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다. 케네디 가족의 경우처럼, 이 침묵은 시술의 문제점을 논의하지 못하게 막았고, 해악이 명확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뇌엽 절제술의 전파를 계속 가능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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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30 Fotos
또 다른 비극의 시작
- 전두엽 절제술에는 숙련된 외과의와 특수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일부 엘리트 환자만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한계는 곧 한 의사의 혁신으로 인해 바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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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30 Fotos
더 간단해진 수술법의 탄생
- 1945년, 월터 프리먼(Walter Freeman)은 ‘안와경유엽절개술(transorbital lobotomy)’을 개발했다. 이는 기존보다 훨씬 저렴하고 빠르며 간단한 방식이었다. 환자는 먼저 전기충격으로 의식을 잃게 만든 뒤, 얼음송곳과 유사한 기구를 눈꺼풀 아래의 안와를 통해 삽입하여 일부 뇌 조직을 절단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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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30 Fotos
몇 분 안에 끝나는 시술
- 이 방식은 외과적 훈련이 없는 일반 의사들도 몇 분 안에 시술을 마칠 수 있었고, 프리먼은 이러한 ‘심리외과의 민주화’를 통해 정신질환 치료를 더 많은 병원과 클리닉으로 확산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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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30 Fotos
끔찍한 수술 광경
- 프리먼은 실제로 자신이 얼마나 신속하게 시술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단 12일 만에 한 병원에서 228건의 안와경유엽절개술을 집도했고,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의 속도와 자신감에 경탄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동료 의사들의 날카로운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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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30 Fotos
우려의 목소리
- 오랜 파트너였던 제임스 와츠(James Watts)는 이 단순화된 시술 방식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이렇게 중대한 수술을 너무나 조잡한 루틴으로 바꾸는 것이 무분별한 시술 남용과 비극적 결과를 낳을 것이라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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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30 Fotos
서구 세계 전역으로 퍼지는 수술법
- 비판에도 불구하고, 안와경유엽절개술은 서구 세계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다. 그 저렴함과 간편함 때문에 많은 의사들이 이를 받아들였고, 윤리적 문제나 동의 절차, 장기적인 결과에 대한 우려는 외면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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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30 Fotos
1950년대, 안정제의 등장
- 하지만 1950년대에 접어들며 새로운 안정제들이 등장했다. 이들 약물은 정신 증상을 보다 안전하고 가역적인 방식으로 조절할 수 있었고, 뇌엽 절제술은 점차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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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30 Fotos
윤리적 성찰 없이 추구된 과학적 야망
- 비록 뇌엽 절제술은 고통받는 이들을 돕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그 참혹한 결과는 윤리적 성찰 없이 추구된 과학적 야망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뇌엽 절제술은 의학의 어두운 과거를 상징하는 사례로 남아 있으며, 우리는 이를 교훈 삼아 미래의 혁신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 되도록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출처: (TED-Ed) (Britannica) (WebMD) (Medical News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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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엽 절제술, 인류 의학사의 가장 섬뜩한 그림자
- 인류 의학 역사상 이토록 섬뜩한 치료법은 드물다. 초기에는 두 마리의 유난히 평온한 침팬지를 대상으로 한 호기심 어린 실험으로 시작되었지만, 전두엽 절제술 또는 뇌엽 절제술로 불리었던 이 방법은 곧 정신의학계 전반에 퍼진 하나의 움직임으로 번져나갔다. 정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했지만, 그 결과는 침묵과 공허,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상실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낙인이 극심하던 시대, 뇌엽 절제술은 단순한 치료법이 아니라 사회가 감당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억지로라도 해결하려 했던 필사적인 반응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고통을 ‘치유’하고자 믿었던 의사들, 해결책을 갈망하던 병원과 제도,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른 수많은 환자가 있다. 환자 대부분은 충분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술에 몸을 맡겨야 했다.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비극, 이 논란의 중심에 섰던 시술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하다면?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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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주목을 받은 침팬지 실험
- 1935년, 미국의 신경생리학자 존 파커 퓰턴(John Farquhar Fulton)은 충격적인 연구 결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두 마리 침팬지의 전두엽을 제거하자, 그들은 좌절감과 불안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퓰턴의 조수는 이 침팬지들이 마치 ‘행복 집단’의 신입 회원처럼 보였다고 말했으며, 놀라울 정도로 평온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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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큰 영감을 받은 신경학자
- 침팬지들이 비정상적으로 차분해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시술은 그들의 인지 능력 일부를 빼앗았다. 그러나 이는 포르투갈의 신경학자 안토니우 에가스 모니스(Ant nio Egas Moniz)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에게 있어 '끝없는 행복'이란,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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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실험에서 인류의 희망으로
- 퓰턴의 연구에 영감을 받은 모니즈는 이 뇌 구조 변경을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통해 다양한 정신질환을 치료하거나, 어쩌면 완치까지 가능하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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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논쟁적인 의료 시술의 탄생
- 그의 이러한 비전은 20세기 가장 논쟁적인 의료 시술 중 하나인 ‘뇌엽 절제술’의 출발점이 되었다. 비록 치료라는 명분에서 비롯된 접근이었지만, 뇌엽 절제술은 깊은 논란, 지속적인 후유증,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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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잘 이해되지 않았던 정신질환의 특성
-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의학계는 정신질환의 복잡한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날 각기 다른 질환으로 분류되는 증상들이 하나로 묶이거나 전혀 잘못 해석되었고, 이는 급진적인 이론들이 제지 없이 퍼질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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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히고설킨 고정 관념의 그물망
- 모니즈는 정신질환이 부정적인 사고가 뇌의 연결섬유, 특히 시상과 전두엽을 연결하는 부위에 ‘고정’되면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 두 영역은 감정과 감각 처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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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치유를 위한 "연결 끊기"
- 그는 이러한 신경 섬유를 절단하면 해로운 사고 패턴과 감정 장애를 차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바로 그가 고안한 악명 높은 외과적 시술, 전전두엽 절제술(prefrontal lobotomy)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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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 구멍
- 초기 뇌엽 절제술은 환자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고, 전두엽 피질과 뇌의 나머지 부분을 잇는 백질 경로를 절단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정신질환을 외과적으로 ‘치료’하려는 대담하고도 침습적인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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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을 향한 비판
- 당시 모니즈의 동료 의사들, 특히 정신분석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은 이 방법에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대화 치료나 비침습적 접근을 선호했기 때문에, 뇌엽 절제술은 극단적이고 무모하다고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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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행된 수술
- 비판에도 불구하고 모니즈는 실험을 강행했다. 그는 조현병, 우울증, 불안증 등을 앓는 환자 38명에게 뇌엽 절제술을 시행했다. 그의 '실험'은 이후 정신외과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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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하게 내린 결론
- 모니즈는 즉시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약 3분의 2의 환자들이 차분하고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환각 증세가 줄어들었다고 주장했다. 이 초기 결과들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 효과를 입증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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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된 행동'이 완치라는 잘못된 개념
- 당시 정신의학계에서는 ‘행동의 안정’이 치료 성공의 기준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조용하고 수동적인 환자들은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호전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비록 환자들의 성격이 상실되거나 기능이 저하되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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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만든 '의료의 기적'
- 모니즈의 발표는 언론의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여러 신문들이 뇌엽 절제술을 ‘기적의 치료법’으로 소개하며, 불안한 마음에 평화를 안겨준다고 찬양했다. 이러한 긍정적인 보도는 뇌엽 절제술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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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생리의학상까지
- 결국 1949년, 모니즈는 그의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술은 미국에서 특히 강하게 뿌리내리게 되었으며, 이는 신경학자 월터 프리먼(Walter Freeman)과 신경외과의사 제임스 와츠(James Watts)가 적극적으로 전파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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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한 시설
- 1930~40년대에 이르자, 약 50만 명에 달하는 미국인들이 정신질환을 이유로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다. 당시 사회는 뇌엽 절제술을 통해 이들 중 상당수가 시설 밖에서 보다 통제 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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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한 사회적 편견에 따라 진행된 수술
- 그러나 문제는 ‘정상’이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실제 정신질환이 아닌, 성 역할, 성적 지향, 혹은 사회적 기대를 벗어난 행동만으로도 수용되었으며, 이는 일부 환자들이 의학적 필요가 아닌 사회적 편견에 따라 뇌엽 절제술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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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로 손상된 건강한 정신
- 그 결과, 뇌엽 절제술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실제로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지 않았다. 단지 ‘통제 불가능’하거나 ‘비정상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는 이유만으로 이 돌이킬 수 없는 시술의 대상이 된 것이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야말로 이러한 수술 남용의 주요 피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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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결과
- 뇌엽 절제술의 효과는 극단적으로 달랐다. 일부 환자들은 증상의 완화를 보였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결과가 치명적이었다. 시술이 얼마나, 언제, 어떤 방식으로 효과를 보일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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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대통령의 누나
- 이 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누이인 로즈메리 케네디였다. 그녀는 1941년, 뇌엽 절제술을 받은 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걸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으며, 남은 생을 시설에서 보내야 했다. 그녀는 2005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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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용
- 비록 일부 환자에서 환각이나 격한 감정이 통제되는 듯한 효과가 보였지만, 부작용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것이었다. 많은 환자가 무감각해지고, 의욕을 잃거나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으며, 운동기능 장애 및 인지 기능이 현저히 저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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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인 피해를 부추긴 침묵
- 정신질환이 깊은 낙인을 안고 있던 시대였기에, 가족들은 실패한 뇌엽 절제술에 대해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다. 케네디 가족의 경우처럼, 이 침묵은 시술의 문제점을 논의하지 못하게 막았고, 해악이 명확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뇌엽 절제술의 전파를 계속 가능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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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비극의 시작
- 전두엽 절제술에는 숙련된 외과의와 특수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일부 엘리트 환자만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한계는 곧 한 의사의 혁신으로 인해 바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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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간단해진 수술법의 탄생
- 1945년, 월터 프리먼(Walter Freeman)은 ‘안와경유엽절개술(transorbital lobotomy)’을 개발했다. 이는 기존보다 훨씬 저렴하고 빠르며 간단한 방식이었다. 환자는 먼저 전기충격으로 의식을 잃게 만든 뒤, 얼음송곳과 유사한 기구를 눈꺼풀 아래의 안와를 통해 삽입하여 일부 뇌 조직을 절단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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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안에 끝나는 시술
- 이 방식은 외과적 훈련이 없는 일반 의사들도 몇 분 안에 시술을 마칠 수 있었고, 프리먼은 이러한 ‘심리외과의 민주화’를 통해 정신질환 치료를 더 많은 병원과 클리닉으로 확산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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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수술 광경
- 프리먼은 실제로 자신이 얼마나 신속하게 시술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단 12일 만에 한 병원에서 228건의 안와경유엽절개술을 집도했고,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의 속도와 자신감에 경탄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동료 의사들의 날카로운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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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의 목소리
- 오랜 파트너였던 제임스 와츠(James Watts)는 이 단순화된 시술 방식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이렇게 중대한 수술을 너무나 조잡한 루틴으로 바꾸는 것이 무분별한 시술 남용과 비극적 결과를 낳을 것이라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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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세계 전역으로 퍼지는 수술법
- 비판에도 불구하고, 안와경유엽절개술은 서구 세계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다. 그 저렴함과 간편함 때문에 많은 의사들이 이를 받아들였고, 윤리적 문제나 동의 절차, 장기적인 결과에 대한 우려는 외면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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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안정제의 등장
- 하지만 1950년대에 접어들며 새로운 안정제들이 등장했다. 이들 약물은 정신 증상을 보다 안전하고 가역적인 방식으로 조절할 수 있었고, 뇌엽 절제술은 점차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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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성찰 없이 추구된 과학적 야망
- 비록 뇌엽 절제술은 고통받는 이들을 돕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그 참혹한 결과는 윤리적 성찰 없이 추구된 과학적 야망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뇌엽 절제술은 의학의 어두운 과거를 상징하는 사례로 남아 있으며, 우리는 이를 교훈 삼아 미래의 혁신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 되도록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출처: (TED-Ed) (Britannica) (WebMD) (Medical News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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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엽 절제술, 인류 의학사의 가장 섬뜩한 그림자
"치료"라는 이름의 폭력, 영혼을 앗아간 수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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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의학 역사상 이토록 섬뜩한 치료법은 드물다. 초기에는 두 마리의 유난히 평온한 침팬지를 대상으로 한 호기심 어린 실험으로 시작되었지만, 전두엽 절제술 또는 뇌엽 절제술로 불리었던 이 방법은 곧 정신의학계 전반에 퍼진 하나의 움직임으로 번져나갔다. 정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했지만, 그 결과는 침묵과 공허,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상실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낙인이 극심하던 시대, 뇌엽 절제술은 단순한 치료법이 아니라 사회가 감당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억지로라도 해결하려 했던 필사적인 반응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고통을 ‘치유’하고자 믿었던 의사들, 해결책을 갈망하던 병원과 제도,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른 수많은 환자가 있다. 환자 대부분은 충분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술에 몸을 맡겨야 했다.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비극, 이 논란의 중심에 섰던 시술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하다면?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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