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시 펜셔너스(The Chelsea Pensioners)는 연금 생활을 하는 영국 육군의 퇴역 군인들로, 런던 첼시에 위치한 전 영국군 병사들의 복지원이자 요양원에 거주 하고 있다. 이들은 주홍색 제복과 삼각 모자로 상징되며, 세계 각지의 군사 작전에 참여해 나라를 위해 봉사했다. 병원은 1692년에 설립되어 첫 번째 퇴역 군인들이 보호받기 시작했다. 오늘날, 이 건물은 국가와 군대 사이의 서약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이 유서 깊은 기관은 정확히 어떻게 발전했으며, 오늘날까지 유지되는 전통은 무엇일까?
영국에서는 17세기까지 노병과 부상당한 군인들의 복지를 위한 국가 차원의 지원이 없었으며, 이는 당시 재위 중인 한 군주의 눈에 띄었다.
이러한 필요에 대응하여, 1681년 찰스 2세 왕은 노령이나 전쟁으로 부상당한 군인들을 돌보기 위해 구빈원 또는 병원을 건설하도록 하는 왕실 칙령을 발행하였다.
저명한 영국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 경(사진)이 건물 설계를 의뢰받았다. 왕의 신뢰받는 유능한 행정관인 스티븐 폭스 경은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임무를 맡았다.
1692년, 첼시 왕립 병원이 개원되었다. 첼시 시골의 템스강 인근에 위치한 이 새로운 요양원은 그해 2월 첫 번째로 99명의 퇴역 군인들을 맞이하였다. 3월에는 병원이 총 476명을 수용하였다. 군인 연금 대신, 이 전직 군인들은 완전한 숙식 제공을 받으며, 병원 내에서 거주한다고 하여 '내부 연금자'로 알려졌다.병원 외부에서 연금을 받는 퇴역 군인들은 '외부 연금자'로 불렸다.
연금 지급 대신 숙소를 제공하는 시스템은 파리의 앵발리드 호텔에서 시행 중인 시스템에서 영감을 받았다. 렌은 자신의 설계를 이 건물을 기반으로 하였다.
1688년부터 1802년 사이에 잉글랜드와 대영 제국의 방어를 위해 영국의 상이군 부대에 속한 일부 퇴역 군인들이 선택적으로 포함되었다. 이들은 수비대로 복무하며 동등한 보상을 받았다. 업너(Upnor) 성 등 영국 전역의 성 및 궁전은 이 부대에 의해 방어되었다(사진 참조).
체허스터 왕립 병원의 구성원들과 병원 내에서 거주하는 퇴역군인 '내부 연금자'들은 붉은색 코트에 파란색 안감과 턱시도 모자를 착용했다. 병원에 입원한 최초의 퇴역 군인 중 한 명인 윌리엄 하이셀랜드(사진 참조)는 자신을 잉글랜드 내전의 마지막 생존자라고 주장했다.
1815년까지 병원에 거주 하지 않으며 연금을 받는 퇴역군인 '외부 연금자'는 36,000명 이상이었다. 영국 국방부가 1955년에 그 역할을 대신하기 전까지 체허스터 왕립 병원은 군 연금을 분배하는 책임을 지속했으며, 이후 "외부 연금자"라는 용어는 잘 사용하지 않게 된 한편, "체허스터 연금자"라는 용어는 크게 "인 펜션자"를 대체했다.
체허스터 왕립 병원이 잘 알려진건 19세기에는부터였다. 역사적 주목 받은 전쟁인 워터루 전투의 생존자들이 이곳에 수용되자 전국적으로 이 곳이 알려졌다. (사진) 1815년에 일어난 워터루 전투의 생존자들이 50년 후인 1865년에 체허스터 왕립 병원에서 찍은 사진으로 보여진다.
20세기에는 보어 전쟁의 퇴역 군인이 첼시 펜셔너스(연금자)의 행렬에 합류하게 되었다. 사진에는 참전용사가 새 군복을 맟춰 입는 모습이다.
이 세 명의 전사는 모두 더럼 라이트 보병 연대(Durham Light Infantry)에서 복무하며, 남아프리카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 했다.
과거 전쟁 참전용사인 첼시 펜셔너들이 전쟁채권 매각을 촉진하고 참호에서 싸우는 최전방 부대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계획인 피드 더 건스(Feed the Guns)와 같은 캠페인을 지원하며 도와주는 모습이 영국내에서 상당수 목격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1930년대 후반, 세계적인 분쟁은 첼시 펜셔너들이 다시 전쟁에 복무하게되는 위협이 되었다. 1939년, 퇴역 군인들이 방독면을 어깨에 메고 병원 운동장을 행진하는 모습이다.
전쟁이 임박하자 노병들은 신병들에게 조언을 해줄 시간을 얻었다. 그러나 막상 교전이 벌어지자 이 퇴역병 50여 명이 대피하는 일도 벌여졌다.
1941년 4월 16일, 2차 세계대전 중 가장 강력한 공습이 있었다. 병원은 직격탄을 맞아 이스트 윙을 파괴했다. 네 명의 간호사, 병동장, 여덟 명의 첼시 펜셔너가 사망했고, 37명이 부상을 입었다.
런던을 탈출한 첼시 펜셔너스이자 퇴역군인들은 영국 시골의 루드홀 매너에 다시 수용되었다. 그들은 1946년까지 그곳에서 간호 직원들과 함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영국 왕립 병원에 새로운 참전 군인들을 참전하게 만들었는데, 대부분은 유럽 전쟁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었고, 노르망디 D-Day 상륙 작전에 참가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제 애정을 담아 "(스칼렛)주홍 군대"라고 불리고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전직 군인들로 인해 계급이 높아졌다. 이 이미지에서 1939-1945년의 참전용사들은 유럽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단체 사진을 찍기위해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모든 첼시 펜셔너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하이라이트이자 아주 특별한 행사 중 하나는 첼시 왕립병원 창립자의 날이다.
창립자의 날은 찰스 2세 국왕에 의한 왕립 병원의 설립을 기념하는 날로 1692년 개원한 이래 거의 매년 개최되고 있다.
1651년 우스터 전투 패배 이후 찰스 2세가 탈출해 의회군에 쫓기다가 참나무에 숨었던 것을 지칭해 오크 애플 데이(Oak Apple Day)라고도 불린다. 이 역사적 에피소드는 첼시 펜셔너 모두가 군복에 참나무 잎을 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 행사는 수 년 동안 영국 왕실 가족 구성원들과 유럽 왕족들에 의한 왕실의 후원을 누려왔다. 여기 2006년 6월 창립자의 날 퍼레이드를 검토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있다.
2023년에는 벨기에 국왕 필리프가 창립자의 날 기념식에서 심사관으로 활동했다.
병원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사실 요양원으로 등록되어있다. 거주자들은 개인 화장실과 필기용 책상과 침대가 있는 충분한 크기의 방에서 지내며 공용 거실은 크리스토퍼 렌이 디자인한 긴 병동에 위치해 있다.
첼시 펜셔너의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는 2009년 왕립병원 첼시가 여성 참전용사 지원서를 접수한 후 가능하게되었다. 1950년대 이후 증가한 여군 모집 인원을 반영하여 위니프레드 필립스(가운데 왼쪽)와 도로시 휴즈가 최초의 여성 첼시 펜셔너가 되었다. 위니프레드는 2016년에, 도로시는 2018년에 사망했다.
여성 참전 용사들은 남성 참전 용사들과 같은 시설과 편의 시설을 즐간다. 여기에는 바, 라운지, 레스토랑, 클럽도 있다.
첼시 왕립 병원은 일반인들이 드나들 수 있다. 현장 박물관은 건물과 거주민들의 역사와 삶을 자세히 설명한다.
왕립 병원의 사우스 그라운드는 매년 열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첼시 플라워 쇼를 포함한 많은 유명 행사의 장소이다.
한편, 첼시 펜셔너들은 영국의 참전용사 공동체라는 상징적인 얼굴로 남아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증언했듯이, 함께 하나로 사는 것은 참전용사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부심과 소속감을 북돋아 준다.
출처: (Chelsea Pensioners) (AGC Association)
영국의 퇴역군인을 위한 복지: 첼시 펜셔너스
300년 전통을 가진 국가를 위해 희생한 주홍색 제복의 수호자 이야기
라이프 스타일 참전용사
첼시 펜셔너스(The Chelsea Pensioners)는 연금 생활을 하는 영국 육군의 퇴역 군인들로, 런던 첼시에 위치한 전 영국군 병사들의 복지원이자 요양원에 거주 하고 있다. 이들은 주홍색 제복과 삼각 모자로 상징되며, 세계 각지의 군사 작전에 참여해 나라를 위해 봉사했다. 병원은 1692년에 설립되어 첫 번째 퇴역 군인들이 보호받기 시작했다. 오늘날, 이 건물은 국가와 군대 사이의 서약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이 유서 깊은 기관은 정확히 어떻게 발전했으며, 오늘날까지 유지되는 전통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