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인디언 전쟁이란 무엇인가?
- 미국 인디언 전쟁을 언급하면 대부분 180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서부 카우보이, 인디언 영화를 떠올릴 수 있다. 사실 미국 인디언 전쟁은 미국 독립 혁명 초기인 1775년부터 1924년까지 이어진 미국의 가장 장기적인 분쟁이다. 미국 역사에서 2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어난 사건을 되돌아보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과 영토, 자원, 무역을 침범한 국경선 주민들 사이에 전쟁이 격화되면서 새로 정착한 미국 땅을 통제하려 했던 시기를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대립 중 일부는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리틀 빅혼 전투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이라고 부르는 국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다른 종류의 군사 교전도 많이 있다. 흥미롭다면? 사진을 통해 미국 인디언 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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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타운 학살
- 제임스타운 학살로 알려진 사건은 1622년 3월 22일 버지니아주 잉글랜드 식민지의 제임스타운에서 발생했으며, 당시 포우하탄 추장 오페찬카누프가 약 1,200명의 식민지 주민 중 약 350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공격이었다. 정착민들의 지속적인 포우하탄 땅 확장과 압수가 결국 습격으로 이어졌지만 보복은 신속했다. 영국군은 아메리카 원주민 마을을 공격하여 농작물을 파괴하고 포우하탄을 그들의 땅에서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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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쿼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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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버 전쟁
- 비버 모피와 관련된 무역으로 인해 이름이 붙여진 비버 전쟁은 이로쿼이 연맹과 프랑스가 지원한 알곤퀸어를 사용하는 부족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 피비린내 나는 갈등은 1640년에 시작되어 6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1701년에 이로쿼이가 적을 물리치고 해체시키면서 끝났다. 이로쿼이는 영토를 확장하고 유럽 시장과의 수익성 높은 모피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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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필립 전쟁
- 또한 대내러갠셋 전쟁으로 알려진 이 치열한 12개월 간의 분쟁은 1675년에서 1676년 사이에 발생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과 영국 정착민 및 그들의 동맹 부족들 간의 전쟁이었다. 영국인들에 의해 필립 왕이라고 불린 왐파노아그 추장 메타콤은 자신들 부족 중 세 명의 처형과 식민지 주민들의 원주민 땅에 대한 추가 침범에 대한 복수를 꾀했다. 이 전쟁은 현재의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심지어 메인 해안까지 포함된 지역에서 벌어졌으며, 1676년 8월 12일 메타콤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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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블로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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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왕 전쟁
- 역사학자들은 윌리엄 왕 전쟁을 첫 번째 프랑스와 인디언 전쟁으로 간주한다. 1689년부터 1697년까지 벌어진 이 전쟁은 9년 전쟁의 북미 전장이었으며, 영국은 이로쿼이 연맹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와바나키 연맹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와 맞서 싸웠다. 이 전쟁은 식민지 코네티컷,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뉴욕에서 모피 무역권과 영토 통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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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넥터디 학살
- 1690년 2월 8일, 200명 이상의 프랑스인과 동맹국 모호크 및 알곤퀸 전사들로 구성된 일행이 콜로니얼 뉴욕의 네덜란드와 영국 정착지를 공격하여 60명이 사망하고 거의 30명이 포로로 잡혔다. 사진은 1690년경 겨울 전쟁 유니폼을 입은 프랑스 군인 또는 민병대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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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여왕 전쟁
-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대영제국, 프랑스, 스페인의 식민 제국과 이들의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국들 간의 전투가 북미에서 계속되었다. 이 전쟁은 1702년부터 1713년까지 이어졌으며, 영국 여왕 앤의 통치 기간을 따서 이름 붙여졌다. 이 전쟁은 뉴잉글랜드,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 스페인령 플로리다의 영토 통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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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스카로라 전쟁
- 1711년에서 1715년 사이에 벌어진 약 4년간의 갈등 동안, 터스카로라족과 영국 식민지 주민들 간의 전쟁으로 인해 200명 이상의 정착민과 약 1,000명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전쟁은 북미 식민지 시대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중 하나로 묘사된다. 터스카로라 전쟁은 결국 터스카로라족의 패배로 끝났으며, 많은 생존자들은 북쪽으로 이주하여 이로쿼이 연맹의 여섯 번째 부족으로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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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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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인디언 전쟁
- 윌리엄 왕 전쟁은 최초의 프랑스와 인디언 전쟁으로 여겨지지만, 1754년에 시작된 이 갈등은 프랑스와 영국 간의 더 광범위한 제국 갈등인 7년 전쟁의 일부였다. 1763년 파리 조약으로 인해 적대 행위가 중단되었고, 이는 독립 전쟁을 종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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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 체로키 전쟁
- 영국과 체로키족은 한때 동맹국이었지만, 1759년 유럽 정착민들의 공격과 토지 침탈로 인해 체로키족의 보복이 발생하자 양측은 캐롤라이나에서 적대 행위를 벌였다. 이 사진은 1761년 앵글로 체로키 전쟁이 끝난 후 여러 체로키 마을의 위치를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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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티악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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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모어 경의 전쟁
- 버지니아의 왕립 총독인 존 머레이, 즉 던모어 경의 이름을 딴 던모어 경의 전쟁은 1774년에 버지니아 민병대가 켄터키의 쇼니족을 공격한 사건을 가리킨다. 쇼니족은 유럽 정착민들의 영토 침범에 맞서 자신들의 땅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 갈등은 1774년 10월 10일에 벌어진 포인트 플레전트 전투로 사실상 종결되었으며, 그 결과 오하이오 강 남쪽 영토는 영국에 할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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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카마우가 체로키 전쟁
- 1776년부터 1794년까지의 치카마우가 체로키 전쟁은 미국 독립 전쟁 중과 그 이후의 체로키족의 투쟁을 상징한다. 체로키족은 이전 영국 식민지에서 테네시, 켄터키, 버지니아, 캐롤라이나, 조지아로 계속 침입하는 것에 반대했다. 결국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한 후 체로키족은 넓은 면적의 땅을 양도해야 했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나중에 오클라호마로 이주했다. 사진은 체로키족이 앵글로 정착민에 맞서 동맹을 맺은 서부 연합의 테쿰세 추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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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른 팀버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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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페카누 전투
- 1811년 11월 7일에 벌어진 티페카누 전투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 소장의 지휘하에 있는 군대와 테쿰세의 형제이자 "예언자"로 알려진 라울레와시카우가 이끄는 쇼니족 간의 주요 충돌이었다. 이 전투는 결국 쇼니족의 패배로 이어졌다. 해리슨은 이후 미국의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1841년 취임 후 단 31일 만에 사망하며 미국 역사상 가장 짧은 재임 기간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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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전쟁
- 1812년 6월, 무역과 해양 주권을 둘러싼 미국과 영국 간의 전쟁은 불가피하게 선언되었으며, 여러 원주민 국가들이 영국 편에 섰다. 이 갈등은 유럽과 세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더 광범위한 갈등의 부산물이었다. 이 전쟁은 육지와 바다에서 싸워졌으며, 1815년 겐트 조약이 비준되어 사실상 무승부로 끝났다. 이로 인해 영국은 캐나다와 그 해양 권리를 유지했고, 미국은 유럽 전역에서 상당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의 서부로의 확장이 증가했고, 테쿰세 추장의 죽음과 원주민들에게 더 많은 위협이 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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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슈 벤드 전투
- 1814년 3월 27일에 벌어진 호스슈 벤드 전투는 크리크 국가가 미국의 남동부 진출에 저항하던 것을 효과적으로 종식시킨 전투이다. 이를 통해 미시시피 영토가 개척민 정착을 위해 열리게 되었으며, 미국군은 이후 제7대 대통령이 된 앤드루 잭슨이 이끌었다. 체로키 족과 친미 성향의 하 크리크 족이 지원하였으며, 이들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지키기 위해 미국의 간섭에 저항하던 상 크리크족 레드스틱이 방어하던 테호페카 마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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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놀 전쟁
- 세미놀 전쟁으로 알려진 세 개의 연관된 군사적 충돌은 미국 남북전쟁 이전 기간 동안 플로리다의 세미놀 인디언들과 미국군을 대립시킨 전쟁이다. 첫 번째 세미놀 전쟁(1816년~1818년)은 남부 농장에서 스페인령 플로리다로 도망친 도망 노예들을 다시 잡기 위해 부분적으로 세미놀 족에게 선포된 전쟁이다. 미국군의 승리와 세미놀 마을의 대규모 파괴는 스페인이 플로리다를 미국에 양도하도록 하여, 미국이 이 지역을 지배하고 부족들을 오클라호마로 강제 이주시킬 권한을 갖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두 번째 세미놀 전쟁(1835년~1842년)은 이러한 강제 추방의 직접적인 결과로 발생했으며, 치열한 저항 끝에 1,500명의 미군 병사가 희생되고 3,000명의 세미놀 족이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속적인 공격과 당국의 괴롭힘은 세 번째 세미놀 전쟁(1855년~1858년)을 일으켰으며, 결국 세미놀 족의 인구를 200명으로 급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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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카라 전쟁
- 아리카라 전쟁은 최초의 대평원 인디언 전쟁으로, 1823년 6월 2일 현재의 사우스다코타에 위치한 미주리 강을 따라 발생한 무장 충돌이다. 이 전쟁은 미국, 다코타 부족(또는 수족) 동맹군, 그리고 아리카라 원주민 간의 대립으로 이루어졌다. 백인 정착민들과의 관계 악화 및 영토 침해가 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 사진은 이 시기의 아리카라 전사를 묘사한 이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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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호크 전쟁
- 소크 전사 블랙 호크 추장의 이름을 딴 블랙 호크 전쟁은 1832년에 시작된 전쟁이다. 그는 아이오와에서 미시시피 강을 건너 일리노이에서 양도된 땅을 되찾기 위해 소크족 무리를 이끌었다. 이 침입은 미국 육군을 경계하게 만들었고, 육군은 다른 부족들과 주 민병대와 동맹을 맺어 이 무리를 저지하였다. 4월부터 8월까지 적대 행위가 이어졌으며,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소크족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블랙 호크와 다른 지도자들은 잠시 체포를 피했지만, 위스콘신 프레리 두 치엔의 크로포드 요새에서 항복하였다. 그들은 1년 동안 감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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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만치 전쟁
- 코만치 전쟁은 1706년부터 최소 1870년대 중반까지 미국과 멕시코에서 코만치족과 스페인, 멕시코, 미국 군대 및 민간인 간에 벌어진 일련의 무장 충돌이다. 코만치족의 부족 영토인 코만체리아는 남부 대평원의 대부분을 가로지르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결국 증가하는 개척민 인구로 인해 그들의 조상 땅을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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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 크리크 학살
- 샌드 크리크 학살은 남북전쟁 시기인 1864년 11월 29일에 발생한 사건이다. 콜로라도 제3기병대의 675명으로 이루어진 부대가 체로키와 아라파호 사람들의 마을을 공격하여, 대부분 비무장 상태였던 여성, 어린이, 노인을 포함해 650명 이상을 학살하였다. 이 학살은 동부 콜로라도 대평원의 통제를 둘러싼 오랜 전투 중 가장 추악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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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클라우드 전쟁
- 몬태나에서 금이 발견된 후, 유럽계 미국인들은 인디언 영토를 가로질러 와이오밍으로 이어지는 보즈먼 트레일을 개척하였다. 이로 인해 자신들의 땅을 보장받았던 조약이 명백히 위반되었다고 분노한 오글라라 족의 지도자 레드 클라우드는 아라파호 족과 샤이엔 족, 그리고 크레이지 호스와 하이-백-본을 포함한 동맹들과 함께 이 트레일을 따라 개척자들과 정착민들을 매복 공격하였다. 이 사건은 "레드 클라우드 전쟁"(1866년~1867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미국 정부와 수 족 간에 체결된 라라미 조약의 서명으로, 미국은 블랙 힐스를 수족 보호구역의 일부로 인정하였으며, 이는 수족만을 위한 독점적인 사용을 위해 마련된 지역이었다. 이 전쟁은 미국에 대항한 유일한 아메리카 원주민 전쟁의 승리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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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빅혼 전투
- "커스터의 마지막 항전"으로 흔히 알려진 리틀 빅혼 전투는 1876년 6월 25일부터 26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미국 육군과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간에 기록된 가장 악명 높은 충돌 중 하나이다.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와 미국 제7기병대의 700명의 병사들은 적에게 기동력을 잃고 결국 언덕 꼭대기에 고립되었다. 이는 1876년 대수족 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투로, 제7기병대의 12개 중대 중 5개가 전멸하고 커스터가 전사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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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리버 전쟁
- 레드 리버 전쟁은 미국 육군과 남부 대평원 인디언들(아라파호, 샤이엔, 코만치, 키오와, 카타카 부족 포함) 간의 마지막 군사 작전이다. 1874년에 텍사스와 오클라호마의 보호구역에 갇혀 있던 여러 부족들이 탈출하여 백인 정착민들을 공격하면서 적대 행위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군대의 보복은 신속했으며, 약 3,000명의 병력이 텍사스 레드 리버 밸리에서 500명 이상의 인디언들을 목표로 삼았다. 이 그림은 1874년 전쟁 중 남부 대평원 인디언들과 미국 육군 간의 무장 충돌인 버팔로 월로 전투를 묘사한 것이다. 이 전쟁은 1875년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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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니 학살
- 1890년 12월 29일, 사우스다코타의 운디드 니 크리크에서 미국 군인들에 의해 수백 명의 라코타 남성, 여성, 어린이가 학살당한 사건은 라코타 캠프를 무장 해제하려던 초기 시도가 실패한 후 발생한 사건이다. 이후 500명 이상의 병력이 캠프를 공격했다. 라코타 전사들은 남아 있던 소량의 무기로 반격했으나, 곧 제압당했다. 당시 이를 "다루기 힘든 적에 대한 승리"로 묘사하며 20명의 군인들에게 명예 훈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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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거 포인트 전투
- "미국에서의 마지막 인디언 봉기"로 종종 언급되는 슈거 포인트 전투는 1898년 10월 5일, 미네소타 슈거 포인트 해안에서 미국 제3보병대와 치페와 인디언 필리저 부족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의 목적은 필리저 오지브웨 추장 부고나이게시그를 체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수의 젊은 필리저 전사들이 약 100명의 미군 보병을 저지하며 소규모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전투와 관련된 이 사진은 1898년 10월 9일자 미네소타 신문 세인트 폴 글로브의 1면에 실린 미군 사상자들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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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 크리크 전투
- 1911년 2월 25일에 벌어진 켈리 크리크 전투는 "마지막 학살"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는 인디언 전쟁 시대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과 미국군 간에 발생한 마지막으로 알려진 무장 충돌 중 하나로 종종 정의된다. 같은 해 1월 11일, 소수의 쇼쇼니족이 네 명의 남성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는 곧 "마지막 학살"로 불리게 되었다. 범인을 찾기 위해 추격대가 파견되었고, 이는 다음 달 네바다의 켈리 크리크라는 장소에서 총격전으로 이어졌다. 이 교전에서 쇼쇼니족 가족 여덟 명과 한 명의 미국인이 사망했다. 이 사진은 교전 후 인디언 캠프의 현장을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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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 밸리 전투
- 1918년 1월 9일, 애리조나의 베어 밸리에서 미국 육군 기병 부대가 30명의 무장한 야키족과 우연히 마주치며 마지막 공식적인 전투가 발생했다. 짧은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야키족 지휘관이 사망하고 9명이 포로로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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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 전쟁
- 베어 밸리 전투가 인디언 전쟁 시대의 마지막 공식적인 무장 충돌로 여겨지는 반면, 1923년 3월 20일부터 23일까지 벌어진 포지 전쟁은 마지막 인디언 봉기로 기록되었다. 이 충돌은 유타 블러프 주변의 땅에서 나바호 산 사막으로 이주하던 유트족과 파이우트족 원주민들과 미국 육군 간에 발생한 소규모 전투였다. 폭력 사태는 포지 추장의 무리 중 두 명이 가축을 죽였다는 혐의로 체포되면서 촉발되었다. 이들은 이후 탈출하였고, 추격대를 조직하여 이들을 쫓았다. 법 집행관들은 결국 포지의 무리와 마주쳤고, 이어진 총격전에서 인디언 추장이 사망하였다. 전투는 유트족과 파이우트족의 항복으로 빠르게 끝이 났다. 1924년에 인디언 전쟁은 종결되었다. 출처: (History of Yesterday) (Indian Pueblo Cultural Center) (South Carolina Encyclopedia) (Seminole County) (National Archives) (Leech Lake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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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디언 전쟁이란 무엇인가?
- 미국 인디언 전쟁을 언급하면 대부분 180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서부 카우보이, 인디언 영화를 떠올릴 수 있다. 사실 미국 인디언 전쟁은 미국 독립 혁명 초기인 1775년부터 1924년까지 이어진 미국의 가장 장기적인 분쟁이다. 미국 역사에서 2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어난 사건을 되돌아보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과 영토, 자원, 무역을 침범한 국경선 주민들 사이에 전쟁이 격화되면서 새로 정착한 미국 땅을 통제하려 했던 시기를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대립 중 일부는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리틀 빅혼 전투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이라고 부르는 국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다른 종류의 군사 교전도 많이 있다. 흥미롭다면? 사진을 통해 미국 인디언 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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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타운 학살
- 제임스타운 학살로 알려진 사건은 1622년 3월 22일 버지니아주 잉글랜드 식민지의 제임스타운에서 발생했으며, 당시 포우하탄 추장 오페찬카누프가 약 1,200명의 식민지 주민 중 약 350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공격이었다. 정착민들의 지속적인 포우하탄 땅 확장과 압수가 결국 습격으로 이어졌지만 보복은 신속했다. 영국군은 아메리카 원주민 마을을 공격하여 농작물을 파괴하고 포우하탄을 그들의 땅에서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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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쿼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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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버 전쟁
- 비버 모피와 관련된 무역으로 인해 이름이 붙여진 비버 전쟁은 이로쿼이 연맹과 프랑스가 지원한 알곤퀸어를 사용하는 부족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 피비린내 나는 갈등은 1640년에 시작되어 6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1701년에 이로쿼이가 적을 물리치고 해체시키면서 끝났다. 이로쿼이는 영토를 확장하고 유럽 시장과의 수익성 높은 모피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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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대내러갠셋 전쟁으로 알려진 이 치열한 12개월 간의 분쟁은 1675년에서 1676년 사이에 발생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과 영국 정착민 및 그들의 동맹 부족들 간의 전쟁이었다. 영국인들에 의해 필립 왕이라고 불린 왐파노아그 추장 메타콤은 자신들 부족 중 세 명의 처형과 식민지 주민들의 원주민 땅에 대한 추가 침범에 대한 복수를 꾀했다. 이 전쟁은 현재의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심지어 메인 해안까지 포함된 지역에서 벌어졌으며, 1676년 8월 12일 메타콤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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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왕 전쟁
- 역사학자들은 윌리엄 왕 전쟁을 첫 번째 프랑스와 인디언 전쟁으로 간주한다. 1689년부터 1697년까지 벌어진 이 전쟁은 9년 전쟁의 북미 전장이었으며, 영국은 이로쿼이 연맹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와바나키 연맹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와 맞서 싸웠다. 이 전쟁은 식민지 코네티컷,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뉴욕에서 모피 무역권과 영토 통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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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넥터디 학살
- 1690년 2월 8일, 200명 이상의 프랑스인과 동맹국 모호크 및 알곤퀸 전사들로 구성된 일행이 콜로니얼 뉴욕의 네덜란드와 영국 정착지를 공격하여 60명이 사망하고 거의 30명이 포로로 잡혔다. 사진은 1690년경 겨울 전쟁 유니폼을 입은 프랑스 군인 또는 민병대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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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여왕 전쟁
-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대영제국, 프랑스, 스페인의 식민 제국과 이들의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국들 간의 전투가 북미에서 계속되었다. 이 전쟁은 1702년부터 1713년까지 이어졌으며, 영국 여왕 앤의 통치 기간을 따서 이름 붙여졌다. 이 전쟁은 뉴잉글랜드,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 스페인령 플로리다의 영토 통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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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스카로라 전쟁
- 1711년에서 1715년 사이에 벌어진 약 4년간의 갈등 동안, 터스카로라족과 영국 식민지 주민들 간의 전쟁으로 인해 200명 이상의 정착민과 약 1,000명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전쟁은 북미 식민지 시대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중 하나로 묘사된다. 터스카로라 전쟁은 결국 터스카로라족의 패배로 끝났으며, 많은 생존자들은 북쪽으로 이주하여 이로쿼이 연맹의 여섯 번째 부족으로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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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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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인디언 전쟁
- 윌리엄 왕 전쟁은 최초의 프랑스와 인디언 전쟁으로 여겨지지만, 1754년에 시작된 이 갈등은 프랑스와 영국 간의 더 광범위한 제국 갈등인 7년 전쟁의 일부였다. 1763년 파리 조약으로 인해 적대 행위가 중단되었고, 이는 독립 전쟁을 종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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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 체로키 전쟁
- 영국과 체로키족은 한때 동맹국이었지만, 1759년 유럽 정착민들의 공격과 토지 침탈로 인해 체로키족의 보복이 발생하자 양측은 캐롤라이나에서 적대 행위를 벌였다. 이 사진은 1761년 앵글로 체로키 전쟁이 끝난 후 여러 체로키 마을의 위치를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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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모어 경의 전쟁
- 버지니아의 왕립 총독인 존 머레이, 즉 던모어 경의 이름을 딴 던모어 경의 전쟁은 1774년에 버지니아 민병대가 켄터키의 쇼니족을 공격한 사건을 가리킨다. 쇼니족은 유럽 정착민들의 영토 침범에 맞서 자신들의 땅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 갈등은 1774년 10월 10일에 벌어진 포인트 플레전트 전투로 사실상 종결되었으며, 그 결과 오하이오 강 남쪽 영토는 영국에 할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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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카마우가 체로키 전쟁
- 1776년부터 1794년까지의 치카마우가 체로키 전쟁은 미국 독립 전쟁 중과 그 이후의 체로키족의 투쟁을 상징한다. 체로키족은 이전 영국 식민지에서 테네시, 켄터키, 버지니아, 캐롤라이나, 조지아로 계속 침입하는 것에 반대했다. 결국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한 후 체로키족은 넓은 면적의 땅을 양도해야 했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나중에 오클라호마로 이주했다. 사진은 체로키족이 앵글로 정착민에 맞서 동맹을 맺은 서부 연합의 테쿰세 추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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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른 팀버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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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페카누 전투
- 1811년 11월 7일에 벌어진 티페카누 전투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 소장의 지휘하에 있는 군대와 테쿰세의 형제이자 "예언자"로 알려진 라울레와시카우가 이끄는 쇼니족 간의 주요 충돌이었다. 이 전투는 결국 쇼니족의 패배로 이어졌다. 해리슨은 이후 미국의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1841년 취임 후 단 31일 만에 사망하며 미국 역사상 가장 짧은 재임 기간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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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전쟁
- 1812년 6월, 무역과 해양 주권을 둘러싼 미국과 영국 간의 전쟁은 불가피하게 선언되었으며, 여러 원주민 국가들이 영국 편에 섰다. 이 갈등은 유럽과 세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더 광범위한 갈등의 부산물이었다. 이 전쟁은 육지와 바다에서 싸워졌으며, 1815년 겐트 조약이 비준되어 사실상 무승부로 끝났다. 이로 인해 영국은 캐나다와 그 해양 권리를 유지했고, 미국은 유럽 전역에서 상당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의 서부로의 확장이 증가했고, 테쿰세 추장의 죽음과 원주민들에게 더 많은 위협이 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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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슈 벤드 전투
- 1814년 3월 27일에 벌어진 호스슈 벤드 전투는 크리크 국가가 미국의 남동부 진출에 저항하던 것을 효과적으로 종식시킨 전투이다. 이를 통해 미시시피 영토가 개척민 정착을 위해 열리게 되었으며, 미국군은 이후 제7대 대통령이 된 앤드루 잭슨이 이끌었다. 체로키 족과 친미 성향의 하 크리크 족이 지원하였으며, 이들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지키기 위해 미국의 간섭에 저항하던 상 크리크족 레드스틱이 방어하던 테호페카 마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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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놀 전쟁
- 세미놀 전쟁으로 알려진 세 개의 연관된 군사적 충돌은 미국 남북전쟁 이전 기간 동안 플로리다의 세미놀 인디언들과 미국군을 대립시킨 전쟁이다. 첫 번째 세미놀 전쟁(1816년~1818년)은 남부 농장에서 스페인령 플로리다로 도망친 도망 노예들을 다시 잡기 위해 부분적으로 세미놀 족에게 선포된 전쟁이다. 미국군의 승리와 세미놀 마을의 대규모 파괴는 스페인이 플로리다를 미국에 양도하도록 하여, 미국이 이 지역을 지배하고 부족들을 오클라호마로 강제 이주시킬 권한을 갖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두 번째 세미놀 전쟁(1835년~1842년)은 이러한 강제 추방의 직접적인 결과로 발생했으며, 치열한 저항 끝에 1,500명의 미군 병사가 희생되고 3,000명의 세미놀 족이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속적인 공격과 당국의 괴롭힘은 세 번째 세미놀 전쟁(1855년~1858년)을 일으켰으며, 결국 세미놀 족의 인구를 200명으로 급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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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카라 전쟁
- 아리카라 전쟁은 최초의 대평원 인디언 전쟁으로, 1823년 6월 2일 현재의 사우스다코타에 위치한 미주리 강을 따라 발생한 무장 충돌이다. 이 전쟁은 미국, 다코타 부족(또는 수족) 동맹군, 그리고 아리카라 원주민 간의 대립으로 이루어졌다. 백인 정착민들과의 관계 악화 및 영토 침해가 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 사진은 이 시기의 아리카라 전사를 묘사한 이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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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호크 전쟁
- 소크 전사 블랙 호크 추장의 이름을 딴 블랙 호크 전쟁은 1832년에 시작된 전쟁이다. 그는 아이오와에서 미시시피 강을 건너 일리노이에서 양도된 땅을 되찾기 위해 소크족 무리를 이끌었다. 이 침입은 미국 육군을 경계하게 만들었고, 육군은 다른 부족들과 주 민병대와 동맹을 맺어 이 무리를 저지하였다. 4월부터 8월까지 적대 행위가 이어졌으며,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소크족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블랙 호크와 다른 지도자들은 잠시 체포를 피했지만, 위스콘신 프레리 두 치엔의 크로포드 요새에서 항복하였다. 그들은 1년 동안 감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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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만치 전쟁
- 코만치 전쟁은 1706년부터 최소 1870년대 중반까지 미국과 멕시코에서 코만치족과 스페인, 멕시코, 미국 군대 및 민간인 간에 벌어진 일련의 무장 충돌이다. 코만치족의 부족 영토인 코만체리아는 남부 대평원의 대부분을 가로지르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결국 증가하는 개척민 인구로 인해 그들의 조상 땅을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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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 크리크 학살
- 샌드 크리크 학살은 남북전쟁 시기인 1864년 11월 29일에 발생한 사건이다. 콜로라도 제3기병대의 675명으로 이루어진 부대가 체로키와 아라파호 사람들의 마을을 공격하여, 대부분 비무장 상태였던 여성, 어린이, 노인을 포함해 650명 이상을 학살하였다. 이 학살은 동부 콜로라도 대평원의 통제를 둘러싼 오랜 전투 중 가장 추악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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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클라우드 전쟁
- 몬태나에서 금이 발견된 후, 유럽계 미국인들은 인디언 영토를 가로질러 와이오밍으로 이어지는 보즈먼 트레일을 개척하였다. 이로 인해 자신들의 땅을 보장받았던 조약이 명백히 위반되었다고 분노한 오글라라 족의 지도자 레드 클라우드는 아라파호 족과 샤이엔 족, 그리고 크레이지 호스와 하이-백-본을 포함한 동맹들과 함께 이 트레일을 따라 개척자들과 정착민들을 매복 공격하였다. 이 사건은 "레드 클라우드 전쟁"(1866년~1867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미국 정부와 수 족 간에 체결된 라라미 조약의 서명으로, 미국은 블랙 힐스를 수족 보호구역의 일부로 인정하였으며, 이는 수족만을 위한 독점적인 사용을 위해 마련된 지역이었다. 이 전쟁은 미국에 대항한 유일한 아메리카 원주민 전쟁의 승리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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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빅혼 전투
- "커스터의 마지막 항전"으로 흔히 알려진 리틀 빅혼 전투는 1876년 6월 25일부터 26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미국 육군과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간에 기록된 가장 악명 높은 충돌 중 하나이다.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와 미국 제7기병대의 700명의 병사들은 적에게 기동력을 잃고 결국 언덕 꼭대기에 고립되었다. 이는 1876년 대수족 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투로, 제7기병대의 12개 중대 중 5개가 전멸하고 커스터가 전사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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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리버 전쟁
- 레드 리버 전쟁은 미국 육군과 남부 대평원 인디언들(아라파호, 샤이엔, 코만치, 키오와, 카타카 부족 포함) 간의 마지막 군사 작전이다. 1874년에 텍사스와 오클라호마의 보호구역에 갇혀 있던 여러 부족들이 탈출하여 백인 정착민들을 공격하면서 적대 행위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군대의 보복은 신속했으며, 약 3,000명의 병력이 텍사스 레드 리버 밸리에서 500명 이상의 인디언들을 목표로 삼았다. 이 그림은 1874년 전쟁 중 남부 대평원 인디언들과 미국 육군 간의 무장 충돌인 버팔로 월로 전투를 묘사한 것이다. 이 전쟁은 1875년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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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니 학살
- 1890년 12월 29일, 사우스다코타의 운디드 니 크리크에서 미국 군인들에 의해 수백 명의 라코타 남성, 여성, 어린이가 학살당한 사건은 라코타 캠프를 무장 해제하려던 초기 시도가 실패한 후 발생한 사건이다. 이후 500명 이상의 병력이 캠프를 공격했다. 라코타 전사들은 남아 있던 소량의 무기로 반격했으나, 곧 제압당했다. 당시 이를 "다루기 힘든 적에 대한 승리"로 묘사하며 20명의 군인들에게 명예 훈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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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거 포인트 전투
- "미국에서의 마지막 인디언 봉기"로 종종 언급되는 슈거 포인트 전투는 1898년 10월 5일, 미네소타 슈거 포인트 해안에서 미국 제3보병대와 치페와 인디언 필리저 부족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의 목적은 필리저 오지브웨 추장 부고나이게시그를 체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수의 젊은 필리저 전사들이 약 100명의 미군 보병을 저지하며 소규모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전투와 관련된 이 사진은 1898년 10월 9일자 미네소타 신문 세인트 폴 글로브의 1면에 실린 미군 사상자들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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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 크리크 전투
- 1911년 2월 25일에 벌어진 켈리 크리크 전투는 "마지막 학살"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는 인디언 전쟁 시대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과 미국군 간에 발생한 마지막으로 알려진 무장 충돌 중 하나로 종종 정의된다. 같은 해 1월 11일, 소수의 쇼쇼니족이 네 명의 남성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는 곧 "마지막 학살"로 불리게 되었다. 범인을 찾기 위해 추격대가 파견되었고, 이는 다음 달 네바다의 켈리 크리크라는 장소에서 총격전으로 이어졌다. 이 교전에서 쇼쇼니족 가족 여덟 명과 한 명의 미국인이 사망했다. 이 사진은 교전 후 인디언 캠프의 현장을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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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 밸리 전투
- 1918년 1월 9일, 애리조나의 베어 밸리에서 미국 육군 기병 부대가 30명의 무장한 야키족과 우연히 마주치며 마지막 공식적인 전투가 발생했다. 짧은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야키족 지휘관이 사망하고 9명이 포로로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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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 전쟁
- 베어 밸리 전투가 인디언 전쟁 시대의 마지막 공식적인 무장 충돌로 여겨지는 반면, 1923년 3월 20일부터 23일까지 벌어진 포지 전쟁은 마지막 인디언 봉기로 기록되었다. 이 충돌은 유타 블러프 주변의 땅에서 나바호 산 사막으로 이주하던 유트족과 파이우트족 원주민들과 미국 육군 간에 발생한 소규모 전투였다. 폭력 사태는 포지 추장의 무리 중 두 명이 가축을 죽였다는 혐의로 체포되면서 촉발되었다. 이들은 이후 탈출하였고, 추격대를 조직하여 이들을 쫓았다. 법 집행관들은 결국 포지의 무리와 마주쳤고, 이어진 총격전에서 인디언 추장이 사망하였다. 전투는 유트족과 파이우트족의 항복으로 빠르게 끝이 났다. 1924년에 인디언 전쟁은 종결되었다. 출처: (History of Yesterday) (Indian Pueblo Cultural Center) (South Carolina Encyclopedia) (Seminole County) (National Archives) (Leech Lake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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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디언 전쟁이란 무엇인가?
미국 인디언 전쟁은 미국에서 가장 장기적인 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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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디언 전쟁을 언급하면 대부분 180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서부 카우보이, 인디언 영화를 떠올릴 수 있다. 사실 미국 인디언 전쟁은 미국 독립 혁명 초기인 1775년부터 1924년까지 이어진 미국의 가장 장기적인 분쟁이다. 미국 역사에서 2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어난 사건을 되돌아보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과 영토, 자원, 무역을 침범한 국경선 주민들 사이에 전쟁이 격화되면서 새로 정착한 미국 땅을 통제하려 했던 시기를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대립 중 일부는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리틀 빅혼 전투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이라고 부르는 국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다른 종류의 군사 교전도 많이 있다.
흥미롭다면? 사진을 통해 미국 인디언 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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