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이 절정에 달했던 서기 117년, 제국은 무려 190만 제곱마일(5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경이로운 면적을 차지했다. 이 대부분은 정복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제국의 지도자들은 승리를 축하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행렬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에게 승리를 기억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정답은 영구적인 무언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개선문을 건설했다. 개선문은 단순히 군사적 성공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를 이룬 통치자를 찬양하기 위한 기념비적인 구조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웅장한 개선문은 단지 돌과 비문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건축, 선전, 예술을 결합한 강력한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렇다면 개선문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로마가 멸망한 후에 건축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사진을 통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고대 로마 도시는 제국 시기에 수많은 건축적 경이로움을 자랑했다. 예배를 위해 사용된 신전과 경기장 역할을 했던 콜로세움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개선문은 기능이 아닌 순전히 상징성만을 위해 지어진 드문 로마 건축물 중 하나로 두드러졌다.
개선문은 조각과 비문으로 장식되어 있어 현대 역사가들에게 로마의 군사 작전, 예술 양식, 정치적 메시지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러한 개선문의 우수한 보존 상태 덕분에 학자들은 이를 수세기 동안 연구해왔다.
개선문은 승리한 장군들이 군사적 성공을 공개적으로 과시했던 개선 행렬의 전통에서 발전했다. 이 행렬은 도시 전체에서 열리는 화려한 축제로, 장군들이 인기를 얻고 전리품을 통해 로마의 지배력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개선 행렬 동안 승리한 장군은 왕복을 입고 전차를 타고 로마를 행진했으며, 뒤따라 원로원 의원, 군인, 그리고 정복지에서 가져온 보물로 가득 찬 전차들이 이어졌다. 행렬은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끝났으며, 며칠 동안 이어질 수 있는 연회와 축제가 열렸다.
행렬은 포르타 트리움팔리스라고 불리는 도시 성벽에 있는 상징적인 문을 통과했다. 이 문은 장군이 개선식을 허가받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었다. 이 경계를 넘음으로써 장군은 공식적으로 군사 권한을 포기했으며, 이는 전쟁에서 평화 시기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포르타 트리움팔리스는 승리와 로마의 위용을 기념하는 깊이 자리 잡은 전통이 되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로마의 정복 황금기를 회상하고 강화하기 위해 도시 곳곳에 많은 개선문을 세웠다.
로마 공화국 시기의 개선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문헌 기록을 통해 그 존재는 확인됐다. 당시 개선문은 아마도 축제를 위해 세워진 임시 목조 구조물이었으며, 이후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01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장군은 두 번째 포에니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카피톨리노 언덕에 개선문을 세울 것을 명령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이 개선문은 꼭대기에 두 마리의 말과 일곱 개의 금박 조각상으로 장식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121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장군은 프랑스에서 켈트족 알로브로게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에 자신의 개선문을 세웠다. 이 개선문이 건설될 당시에는 스키피오 장군의 개선문은 이미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언급했듯이, 로마 공화국 시기에 건설된 개선문은 종종 목조 구조물이었다. 이 개선문은 화려하게 장식되었지만, 승리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만 유지되도록 설계되었다. 축제가 끝난 후에는 이러한 임시 기념물이 해체되고 잊혀졌다.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었을 때, 개선문 건설의 특권을 자신과 그의 가족에게만 허용했다. 이를 통해 군사 장군들이 개선문을 이용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는 것을 막았으며, 모든 승리가 황제에게만 공로가 돌아가도록 했다.
개선문은 황제 시대에 정치적 선전 도구로 변모했다. 개별 장군들과 그들의 군사 작전을 기념하는 대신, 황제의 권력을 찬양하며 그의 신성한 권위를 강화하고 제국을 확장하고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시민들에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공화국 시기의 목조 개선문과 달리 제국 시대의 개선문은 석재와 로마 시멘트(오푸스 카멘티키움)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재료들은 개선문의 내구성을 보장했으며, 로마의 군사적 업적과 황제의 위대함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는 상징으로 남게 했다.
제국 시대에 개선문은 점점 더 커졌으며, 일부는 앞에서 뒤까지 최대 37피트(11.3미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는 건축가들이 더욱 정교한 조각, 부조, 비문을 제작할 수 있게 하여 기념물의 스토리텔링과 시각적 효과를 강화했다.
후대의 개선문은 중앙 개선문 양쪽에 두 개의 작은 측면 개선문을 추가로 배치했다. 이는 구조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정교한 조각을 위한 추가 공간을 제공하여 더욱 시각적으로 인상적인 모습을 만들었다.
개선문의 최상부인 애틱 부분은 비문과 예술 작품을 엄격히 사용하기 위한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 이곳에는 종종 전투 장면, 패배한 적에게서 얻은 무기, 그리고 전차를 탄 승리한 황제의 조각상이 포함되어 그의 지배력을 상징했다.
아우구스투스 통치하에 세워진 초기의 개선문은 단조롭고 다소 어색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개선문은 이후 로마 제국의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 세부 장식으로 특징지어질 웅장한 개선문과는 거리가 있었다.
로마 건축가들이 헬레니즘,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의 예술과 건축을 접하면서 이 영향을 디자인에 통합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티투스 개선문처럼 다양한 예술적 전통이 어우러진 더욱 정교하고 아름답게 균형 잡힌 개선문이 탄생했다.
서기 81년 고대 로마의 주요 거리인 비아 사크라에 세워진 티투스 개선문은 로마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개선문이다. 이 개선문은 유대 전쟁에서의 로마의 승리와 11년 전에 티투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을 기념한다.
공화국과 제국 시대에 걸쳐 많은 개선문이 특정 군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제국 시대의 개선문은 오직 황제만을 위해 건설되었다. 이러한 구조물들은 도시의 군사력을 영구적으로 증명하는 기념물로 기능했다.
서기 203년에서 205년 사이 로마 포룸에 세워진 이 웅장한 개선문은 아라비아와 아시리아에서의 파르티아인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며, 세베루스 황제와 그의 아들들을 찬양했다. 이 개선문은 정교한 부조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서기 312년에서 315년 사이에 건설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황제가 거둔 승리를 기념한다. 콜로세움 근처에 위치하며 로마에서 가장 잘 보존되고 화려하게 장식된 개선문 중 하나이다.
높이 69피트(21미터)에 달하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건축적 경이로움이다. 크고 정교한 부조와 비문은 콘스탄티누스의 군사적 성공을 찬양하며, 황제들에게 관례적으로 사용된 표현으로 그를 "가장 위대한, 경건한, 축복받은 아우구스투스"라고 칭송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스폴리아라고 알려진 관행을 통해 이전 로마 기념물에서 가져온 조각상들을 자신의 개선문 장식을 위해 재사용했다. 여기에는 2세기 전에 지어진 트라야누스 포룸에서 가져온, 약 10피트(3미터)에 달하는 다키아 포로들의 조각상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개선문이 군사적 승리를 기념한 것은 아니었다. 리미니에 있는 아우구스투스 개선문과 같은 일부는 도로 복구와 같은 인프라 프로젝트를 기념했다. 이 기념물은 로마의 시민 개발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흥미롭게도 개선문은 제국의 수도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실제로 제국 전역의 여러 지방에서도 황제를 기리기 위해 개선문을 건설했다. 예를 들어, 현재 리비아의 폐허 도시인 렙티스 마그나에는 세베루스 황제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네 방향의 세베루스 개선문이 세워졌다. 이 건축물은 지방에서도 황제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작용했다.
로마 개선문의 웅장한 디자인은 찰스 5세와 나폴레옹과 같은 이후의 유럽 통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이러한 기념비적인 스타일을 재현하려 했다. 로마 개선문이 없었던 일부 도시에서도 유사한 스타일로 자체 개선문을 건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는 1806년에 나폴레옹이 개선문 건설을 명령한 것이다. 파리 개선문은 장 샬그랭이 설계했으며,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싸우고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애국적인 기념물로 만들어졌다.
로마가 멸망한 뒤에도 개선문은 강력한 건축적 상징으로 남아 있다. 전 세계 많은 도시가 기념물을 위해 이 디자인을 채택했으며, 로마 제국 자체보다 오랜 기간 그 영향력이 지속된 것은 고대 로마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출처: (National Geographic) (Britannica) (Walks Inside Rome)
로마 개선문에 숨겨진 놀라운 이야기
권력의 상징으로 우뚝 선 도시의 승리 건축물
라이프 스타일 건축물
로마 제국이 절정에 달했던 서기 117년, 제국은 무려 190만 제곱마일(5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경이로운 면적을 차지했다. 이 대부분은 정복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제국의 지도자들은 승리를 축하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행렬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에게 승리를 기억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정답은 영구적인 무언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개선문을 건설했다. 개선문은 단순히 군사적 성공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를 이룬 통치자를 찬양하기 위한 기념비적인 구조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웅장한 개선문은 단지 돌과 비문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건축, 선전, 예술을 결합한 강력한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렇다면 개선문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로마가 멸망한 후에 건축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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