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의학 역사상 이토록 섬뜩한 치료법은 드물다. 초기에는 두 마리의 유난히 평온한 침팬지를 대상으로 한 호기심 어린 실험으로 시작되었지만, 전두엽 절제술 또는 뇌엽 절제술로 불리었던 이 방법은 곧 정신의학계 전반에 퍼진 하나의 움직임으로 번져나갔다. 정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했지만, 그 결과는 침묵과 공허,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상실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낙인이 극심하던 시대, 뇌엽 절제술은 단순한 치료법이 아니라 사회가 감당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억지로라도 해결하려 했던 필사적인 반응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고통을 ‘치유’하고자 믿었던 의사들, 해결책을 갈망하던 병원과 제도,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른 수많은 환자가 있다. 환자 대부분은 충분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술에 몸을 맡겨야 했다.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비극, 이 논란의 중심에 섰던 시술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하다면?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자.
1935년, 미국의 신경생리학자 존 파커 퓰턴(John Farquhar Fulton)은 충격적인 연구 결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두 마리 침팬지의 전두엽을 제거하자, 그들은 좌절감과 불안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퓰턴의 조수는 이 침팬지들이 마치 ‘행복 집단’의 신입 회원처럼 보였다고 말했으며, 놀라울 정도로 평온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고 전했다.
침팬지들이 비정상적으로 차분해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시술은 그들의 인지 능력 일부를 빼앗았다. 그러나 이는 포르투갈의 신경학자 안토니우 에가스 모니스(Ant nio Egas Moniz)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에게 있어 '끝없는 행복'이란,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퓰턴의 연구에 영감을 받은 모니즈는 이 뇌 구조 변경을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통해 다양한 정신질환을 치료하거나, 어쩌면 완치까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의 이러한 비전은 20세기 가장 논쟁적인 의료 시술 중 하나인 ‘뇌엽 절제술’의 출발점이 되었다. 비록 치료라는 명분에서 비롯된 접근이었지만, 뇌엽 절제술은 깊은 논란, 지속적인 후유증,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게 된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의학계는 정신질환의 복잡한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날 각기 다른 질환으로 분류되는 증상들이 하나로 묶이거나 전혀 잘못 해석되었고, 이는 급진적인 이론들이 제지 없이 퍼질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모니즈는 정신질환이 부정적인 사고가 뇌의 연결섬유, 특히 시상과 전두엽을 연결하는 부위에 ‘고정’되면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 두 영역은 감정과 감각 처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는 이러한 신경 섬유를 절단하면 해로운 사고 패턴과 감정 장애를 차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바로 그가 고안한 악명 높은 외과적 시술, 전전두엽 절제술(prefrontal lobotomy)로 이어졌다.
초기 뇌엽 절제술은 환자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고, 전두엽 피질과 뇌의 나머지 부분을 잇는 백질 경로를 절단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정신질환을 외과적으로 ‘치료’하려는 대담하고도 침습적인 시도였다.
당시 모니즈의 동료 의사들, 특히 정신분석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은 이 방법에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대화 치료나 비침습적 접근을 선호했기 때문에, 뇌엽 절제술은 극단적이고 무모하다고 여겨졌다.
비판에도 불구하고 모니즈는 실험을 강행했다. 그는 조현병, 우울증, 불안증 등을 앓는 환자 38명에게 뇌엽 절제술을 시행했다. 그의 '실험'은 이후 정신외과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모니즈는 즉시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약 3분의 2의 환자들이 차분하고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환각 증세가 줄어들었다고 주장했다. 이 초기 결과들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 효과를 입증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정신의학계에서는 ‘행동의 안정’이 치료 성공의 기준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조용하고 수동적인 환자들은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호전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비록 환자들의 성격이 상실되거나 기능이 저하되었더라도 말이다.
모니즈의 발표는 언론의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여러 신문들이 뇌엽 절제술을 ‘기적의 치료법’으로 소개하며, 불안한 마음에 평화를 안겨준다고 찬양했다. 이러한 긍정적인 보도는 뇌엽 절제술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결국 1949년, 모니즈는 그의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술은 미국에서 특히 강하게 뿌리내리게 되었으며, 이는 신경학자 월터 프리먼(Walter Freeman)과 신경외과의사 제임스 와츠(James Watts)가 적극적으로 전파했기 때문이다.
1930~40년대에 이르자, 약 50만 명에 달하는 미국인들이 정신질환을 이유로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다. 당시 사회는 뇌엽 절제술을 통해 이들 중 상당수가 시설 밖에서 보다 통제 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문제는 ‘정상’이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실제 정신질환이 아닌, 성 역할, 성적 지향, 혹은 사회적 기대를 벗어난 행동만으로도 수용되었으며, 이는 일부 환자들이 의학적 필요가 아닌 사회적 편견에 따라 뇌엽 절제술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뇌엽 절제술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실제로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지 않았다. 단지 ‘통제 불가능’하거나 ‘비정상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는 이유만으로 이 돌이킬 수 없는 시술의 대상이 된 것이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야말로 이러한 수술 남용의 주요 피해자였다.
뇌엽 절제술의 효과는 극단적으로 달랐다. 일부 환자들은 증상의 완화를 보였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결과가 치명적이었다. 시술이 얼마나, 언제, 어떤 방식으로 효과를 보일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누이인 로즈메리 케네디였다. 그녀는 1941년, 뇌엽 절제술을 받은 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걸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으며, 남은 생을 시설에서 보내야 했다. 그녀는 2005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일부 환자에서 환각이나 격한 감정이 통제되는 듯한 효과가 보였지만, 부작용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것이었다. 많은 환자가 무감각해지고, 의욕을 잃거나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으며, 운동기능 장애 및 인지 기능이 현저히 저하되었다.
정신질환이 깊은 낙인을 안고 있던 시대였기에, 가족들은 실패한 뇌엽 절제술에 대해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다. 케네디 가족의 경우처럼, 이 침묵은 시술의 문제점을 논의하지 못하게 막았고, 해악이 명확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뇌엽 절제술의 전파를 계속 가능하게 만들었다.
전두엽 절제술에는 숙련된 외과의와 특수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일부 엘리트 환자만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한계는 곧 한 의사의 혁신으로 인해 바뀌게된다.
1945년, 월터 프리먼(Walter Freeman)은 ‘안와경유엽절개술(transorbital lobotomy)’을 개발했다. 이는 기존보다 훨씬 저렴하고 빠르며 간단한 방식이었다. 환자는 먼저 전기충격으로 의식을 잃게 만든 뒤, 얼음송곳과 유사한 기구를 눈꺼풀 아래의 안와를 통해 삽입하여 일부 뇌 조직을 절단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외과적 훈련이 없는 일반 의사들도 몇 분 안에 시술을 마칠 수 있었고, 프리먼은 이러한 ‘심리외과의 민주화’를 통해 정신질환 치료를 더 많은 병원과 클리닉으로 확산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리먼은 실제로 자신이 얼마나 신속하게 시술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단 12일 만에 한 병원에서 228건의 안와경유엽절개술을 집도했고,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의 속도와 자신감에 경탄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동료 의사들의 날카로운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파트너였던 제임스 와츠(James Watts)는 이 단순화된 시술 방식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이렇게 중대한 수술을 너무나 조잡한 루틴으로 바꾸는 것이 무분별한 시술 남용과 비극적 결과를 낳을 것이라 우려했다.
비판에도 불구하고, 안와경유엽절개술은 서구 세계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다. 그 저렴함과 간편함 때문에 많은 의사들이 이를 받아들였고, 윤리적 문제나 동의 절차, 장기적인 결과에 대한 우려는 외면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1950년대에 접어들며 새로운 안정제들이 등장했다. 이들 약물은 정신 증상을 보다 안전하고 가역적인 방식으로 조절할 수 있었고, 뇌엽 절제술은 점차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비록 뇌엽 절제술은 고통받는 이들을 돕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그 참혹한 결과는 윤리적 성찰 없이 추구된 과학적 야망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뇌엽 절제술은 의학의 어두운 과거를 상징하는 사례로 남아 있으며, 우리는 이를 교훈 삼아 미래의 혁신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 되도록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출처: (TED-Ed) (Britannica) (WebMD) (Medical News Today)
전두엽 절제술, 인류 의학사의 가장 섬뜩한 그림자
"치료"라는 이름의 폭력, 영혼을 앗아간 수술법
라이프 스타일 의학
인류 의학 역사상 이토록 섬뜩한 치료법은 드물다. 초기에는 두 마리의 유난히 평온한 침팬지를 대상으로 한 호기심 어린 실험으로 시작되었지만, 전두엽 절제술 또는 뇌엽 절제술로 불리었던 이 방법은 곧 정신의학계 전반에 퍼진 하나의 움직임으로 번져나갔다. 정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했지만, 그 결과는 침묵과 공허,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상실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낙인이 극심하던 시대, 뇌엽 절제술은 단순한 치료법이 아니라 사회가 감당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억지로라도 해결하려 했던 필사적인 반응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고통을 ‘치유’하고자 믿었던 의사들, 해결책을 갈망하던 병원과 제도,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른 수많은 환자가 있다. 환자 대부분은 충분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술에 몸을 맡겨야 했다.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비극, 이 논란의 중심에 섰던 시술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하다면?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자.